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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필름이 남긴 말/채재순
 김정수  | 2015·06·08 17:08 | HIT : 1,640 |
거울과 필름이 남긴 말
채재순


거울
색깔까지도 똑같이 담아냈지
날아가는 새든, 묵묵부답인 저 벽이든
누구든 내 앞에 서면 같아질 수 있지
표정까지도

필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보고
수천 가지의 표정을 만들어냈을 뿐
자아, 당신 안에 있던 구름과 나무, 계단과 그늘은
다 어디 있던 거지?

필름
내가 본 것들은 다 기억하고 있지
저기 연인들이 발발거리고 쏘다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몸에 새겨두고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지, 절대

거울
당신은 단지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만으로도 꽉 차서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지
가슴에 안긴 물고기 지느러미 끝내 파닥일 수 없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이생은 짧고 아름다운 거라고
조바심과 애착을 지나
박차를 가하던 치열한 시간을 지나
단잠을 지나 푹신해진 오늘에 이르러

산 정상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한 번 엇갈리면 만날 수 없지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지

-《시와경계》 2015년 봄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시를 읽는 실마리는 ‘표정’과 ‘기억’에 있다. ‘거울’과 ‘필름’, ‘나’와 ‘당신’의 교차를 표정과 기억을 통해 순차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먼저 ‘표정’부터 살펴보자. 시인은 단순히 얼굴을 드러나는 거울과 여러 가지 마음속의 심리와 감정의 모습까지 담아내는 필름을 통해 ‘표정’을 포착해내고 있다. 거울 앞에 서면 “색깔까지도 똑같”고, “날아가는 새든, 묵묵부답인 저 벽이든/누구든” 같아진다. ‘당신’이 어떤 성격(색깔)이든, 벽처럼 고집불통이라도, 아무리 다른 표정을 지어도 거울 앞에서 내면을 보여주지 못하는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반면에 필름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보고/수천 가지의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에 시인은 묻는다. “당신 안에 있던 구름과 나무, 계단과 그늘은/다 어디 있던 거지?” 필름이 담아온 풍경은 필름의 것이 아니다. 그저 카피해온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당신의 원형’은 ‘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당신이 아무리 다른 표정을 지어도 내 앞에 서면 ‘같다’는 것이다.
필름은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을 보존하거나 되살려 기억한다. “저기 연인들이 발발거리고 쏘다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 것들은 다 기억”한다. ‘연인들’은 나와 당신의 또 따른 이름이다. 그래서 “몸에 새겨두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몸에 새겨둔다는 것은 내 몸에 ‘당신’을 새기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문신처럼 새겨 평생 간직하고 있다는 지고지순한 사랑고백인 것이다.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되거나 되살려 생각하는 것이 기억이지만 거울은 이러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일방적인 관계, 일방적인 사랑인지라 “당신은 단지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그것만으로도 꽉 차서/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지”라는 진술이 더 애타고 안타깝게 다가온다.
자, 그러면 시인이 당신의 표정을 살피고, 기억을 더듬는 것은 왜일까? 당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만약 시적 상황이, 당신이 죽을 만큼 아프다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이생은 짧고 아름다운 거”라는 ‘나’의 자기고백은 더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가슴에 안긴 물고기 지느러미 끝내 파닥일 수 없”는 상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거울의 뒷면과 같다. 거울의 앞면은 생(나)이고, 거울의 뒷면은 사(당신)인 것이다. “한 번 엇갈리면 만날 수 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거울을 통해 ‘표현’하고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다 하여 언젠가는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방식이란 말인가.

-<시와경계>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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