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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던 강, 멈추어 서는 강
 이성목    | 2010·05·02 15:34 | HIT : 4,685 |
 소식


  당신과 자주 싸우고 상한 마음을 씻으러 나갔던 아득한 시절의 강이 있습니다. 아프다, 아프다 물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등을 구부리고 강물에 얼굴을 씻던 자리, 모래가 제 몸을 무너뜨려 물결을 다독이던 그런 강이 있습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깊은 마음의 수위를 거느리게 했던, 강의 위독한 소식을 들은 지 한참이나 지난 듯 아득한 오월입니다. 마른 부지깽이에서도 싹이 튼다는 시절이 되어서 비로소 당신의 안녕을 묻는 그 강의 후레자식이 내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오늘은 자책의 하루를 보냈습니다.
  허망하게도 소식은 당신의 순결한 손으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맑은 마음으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잠결에 웅웅거리는 텔레비전에서, 생선을 덮었던 신문지에서, 호곡처럼 추깃물처럼 지독하게 나를 찾아옵니다. 부음을 받았던 손의 막막함처럼, 어쩔 줄을 모르게 마음을 수습하러 보 공사장으로 나갔습니다.
  어깨며 옆구리가 벌써 다 무너지고 없습니다. 해마다 오월이면 버드나무 가지마다 탱탱하게 물을 쟁여 넣어주던 그 야무진 둑방도, 물가에 은빛 평원을 펼쳐서 맨발로 그곳을 걷게 했던 눈부신 당신은 없습니다. 중장비의 굉음이 물소리를 뒤덮어 강이 무성영화처럼 번쩍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아, 나도 모르게 당신의 이름이 입술을 비집고 신음처럼 흘러나왔습니다. 무엇으로 저 광기를 멈추게 한답니까?  당신......



해평 습지


  무논에 그늘이 내리고, 며칠을 골방에 앉아 기다리다가 신새벽 강둑을 걸어서 무논에 내려섭니다. 살얼음처럼 내린 그늘 한 겹씩 벗겨내면 발목까지 젖어 있던 새들의 발자국 떠오릅니다. 발자국만으로도 새들의 이름을 다 부를 수 있었습니다. 보세요. 해뜨는 붉은 하늘이 낡은 보자기 뒤덮은 듯 펄럭이는 저 몸짓은 당신의 슬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날개를 가진 당신, 우리는 철이 없게도 펄럭이는 것들에게 <싸이나>라는 이름의 콩약을 먹이고, 꺾인 날개를 전리품처럼 줍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신이라는 강의 품이 한없이 넓고 깊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당신도 강처럼 젖어서 나에게 스며들어 자주 강이 되었지요. 푸르게 넘치던 물길이며 눈부신 모래밭이며 저를 밟고 간 것들을 발자국으로 기억하는 강을 이제는 볼 수 없는 슬픔이, 치사량의 콩약을 삼킨 청둥오리 깃보다 붉고 푸르고 깊습니다.
  상상조차 못한 일입니다. 당신, 새로 난 25번 국도를 따라 강변에 펼쳐진 습지에 까맣게 박혀있던 흑두루미 떼를 기억합니다. 새는 발마저 날개였는지 새들이 섰던 자리가 어디로든 날아가겠다는 듯 가슴을 태웁니다. 그렇지요. 아직도 저 날개짓이 짙푸른 청춘인데, 물이 다 마른 땅에 저를 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지요. 때늦은 황사인지, 모래바람이 냉산을 향하여 자욱하게 몰려갑니다. 모래바람을 핑계 삼아 눈물을 쏟아냅니다.



냉산을 바라보며


  보천사가 있던 그 강변의 아늑한 솔밭이라든지, 강의 한가운데 섬이 생기고 어디서 씨앗들이 흘러와서 일가를 이루고 촌락을 이루고 부족을 이루었는지 울창한 버드나무숲이 몇 해 전에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장 짤막한 여행으로 기록될, 낙동강의 가장 길고 긴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동안에도 강은 그저 강이었고 우리는 그저 그 강을 흐르는 물이었습니다. 강물이 흘러온 강의 전부 기억하지 못하듯, 내가 당신의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듯, 솔밭도 버드나무 숲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아프지 않고, 슬프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은 것처럼, 강의 부음과 습지와 솔밭과 버드나무 숲의 동거에는 누구나 다 아는 밀약 같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어느 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습지가 사라지고 솔밭이 사라지고 없어져도 강을 바로 세워 무엇을 물어볼 수 있겠는지요. 그 강물은 지금 이 시절을 지나는 강물이 아닌 것을, 나중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일 수 없듯이, 그리하여 오늘이 어떤 내일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지듯이...... 당신은 지금 어느 시절을 지나가는 중입니까? 그 강변에서 발을 씻는 버드나무 가족을 본 적은 있습니까? 물어볼 수 있겠는지요.
   저 산은 오늘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없이 응시합니다. 산이 얼마나 냉엄한 것이었으면 이름조차 냉산(冷山)일까.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산허리며 정수리를 눈으로 더듬거리며 강의 비사를 기억하라고 전하고 전합니다. 붉은 진달래가 흐르는 강, 멈추어 서는 강을 다 기록하고 있는 듯 발갛게 온 산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달맞이꽃을 기억함


  그 여름날의 달맞이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몰의 강, 모래무지가 강물을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게 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으면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나질 않는 것일까요. 그렇겠지요. 시간이 아니라 무심함 때문이었겠지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씩 들려오는 당신의 소식, 마을 앞을 지나는 전신주에 잠시 걸려 있던 당신의 소식, 강물을 따라 흐르다가 물결소리로 일어서서 가는 당신의 소식, 아이를 낳았다는, 그리고 초상을 치렀다는 소식들. 바람소리들, 풀벌레 소리들.......
  그럴 때마다 우리 이미 늦었다고, 그날 강변에 흐드러진 달맞이꽃을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래무지처럼 온 몸을 던지고 싶었던 일몰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은 강 가까이에 있었고, 강물은 자주 넘쳐 마을을 덮치곤 했었는데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넘쳐흐르지 못하는 개울물처럼 자주 울기만 했었던가요. 강의 위쪽에 댐이 생기면서 물이 얕아지고 우리는 한달음에 서로에게 건너갈 수 있는 날이 왔는데도 우리는 또 변함없이 강의 양쪽 기슭에 앉아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던가요. 우리는 왜 그렇게 멀고 아득한 거리에 서서 어두워졌을까요. 달과 꽃의 거리만큼 그렇게 ....
   이제 날이 저물고 당신은 밥 냄새를 내보내 아이들을 부르고 있겠지요. 그리움이란, 밥 냄새처럼 공복을 들쑤시며 오는 것이겠지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강물이 넘치며 그 마을 앞으로 몰려가듯 그리움은 또 그렇게 우리들을 눈멀게 하는 것이겠지요.
  아이들이 돌아왔군요. 당신은 이미 당신의 자리로 돌아갔군요. 그 여름날의 강변에서 달맞이꽃이 서 있던 자리로, 하지만 오래 비가 내릴 거라고 하는군요. 아주 오래 오래... 아아, 뿌리 단단하게 붙들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무너지려는 마음과 몸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강물이 푸르게 되살아나서 수른수른 흐르는 날, 당신을 기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여행지 메모}



[해평습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낙동강 본류와 주변의 습기가 많은 땅.
낙동강 오른쪽의 고아읍과 왼쪽의 해평면 행정구역 안에는 낙동강 본류와 접해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현재는 큰 하중도가 해평면의 문량들 앞쪽에 형성되어 있다.
철새도래지로도 알려져 있는 해평습지는 겨울철새들, 특히 세계적인 희귀조류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재두루미, 흑두루미, 고니 등 60여 종의 철새와 텃새들의 안식처이다.



[냉산]


경북 구미시 해평면 ·도개면과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691 m.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며, 팔공산맥에 속한다. 해평면에 속하는 남서사면에는 도리사(桃李寺) ·냉산성 ·금수굴 등의 명승지가 있다. 도리사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5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혜영 참 아프네요. 아프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강이 우리이고 우리가 강인데... 여태 같이 흘러왔는데, 그 아픔, 그 고퉁의 신음소리가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봅니다. 신음소리가 참 깊이 저리고 아프네요.

10·05·02 22:57  

이타린 토요일 아침 정갈하게 앉아
/밥 냄새처럼 공복을 들쑤시며 오는/ 글, 잘읽었습니다.
명품글에 명품 답글로 보답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네요.
시간이 되면 해평습지에 가서 / 모래바람을 핑계 삼아 눈물을 쏟아/ 내어볼까 생각중에 있습니다.
이성목 선생님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10·05·15 15:15  

이우정 잃어버린 유년의 기억.모두다 그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가슴앟ㄹ이를 하구 다시금 그리운 그 어린날의 기억들.훌쩍 크버린 나자신을 발견하고 또 놀라구.....추억은 아름다운 것이지요...해평의 강 둑과 땅콩밭의 추억이 있는 님은 행복한 분입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10·05·20 00:35  

이승하 이런 아름다운 산야가, 강이 인간의 손에 의해 마구 개발되고 훼손되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이성목 님은 시도 에세이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해놓고 계시네요.

10·08·28 09:07  

  
  《산이》라는 이름의 붉음 [4]  이성목 10·04·07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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